심상은 6.25참전소년학도병 회장 “71년간 정부로부터 왜면 당했다”...정부나 국회나 뭘 했나?심상은 6.25참전소년학도병 회장 “71년간 정부로부터 왜면 당했다”...정부나 국회나 뭘 했나?▶심상은 소년학도병 회장 “71년간 국가로부터 외면당해” 폭로 ▶5만여 소년학도병, 소대장부터 최종 국방부 행정 요원, 기능직 모두 ‘학도병’ 맞고 있어 ‘학도병’ 제대 국군의 명맥 무너질 판 ▶20년간 국회 드나들며 못 배우고, 빽없고, 돈 없어 국가 유공자 성사시키지 못해” 목메어 비판 ▶정부가 해야 할 일 민간차원의 심상윤 뉴스타운 회장 ‘자유의 학도병상’ 건립에 감사6.25 전쟁 때 강원도 원주 한 중학교 4학년 학생이 육군 3군단 첩보대 ‘학도병’으로 지원해 총상을 입고 치료 후 복귀해 1955년 8월 8일 제대한 ‘심상은 6.25 참전 소년학도병 회장’이 지난 26일 경북 영천 제1호 ‘자유의 학도병상 제막식’에 참석해 “우리는 71년간 국가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16대 국회 민주당 김대중 정권부터 시작해 현재 21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국가 유공자로 해달라는 법안 발의를 6번에 걸쳐 올렸으나 5번은 폐기되고 현재도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류 중”이라며 “국가 유공자 지원에 관한 법률이 바로 국가 유공자가 되는 것이다, 막말로 하자면 국가가 우리에게 사기를 치고 있다”고 정부와 국회를 싸잡아 비판했다.
심 회장은 또 “국가유공자법 제4조 1항 10호 6.25참전자에 대해 들어가 있다”면서 “그 내용 대로면 모든 국가 유공자는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제4조 4항에서도 4조 1항에도 국가유공자에 대해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6.25 참전자에 대한 법이 따로 있다. 우리믄 그 법을 적용받는다고 돼 있다, 이는 결국 명칭만 허울 좋은 개살구로 유공자라고 붙여놨을 뿐이다”고 분노했다.
이어 “우리가 6.25 전쟁 당시 18세 미만 즉 17세 나이에 6.25 전쟁에 투입됐다. 그러면 제일(일본) 학도의용군도 병역의무가 없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 전쟁에 참전해 5개월~6개월 후 곧바로 일본으로 귀국하려 해도 안 되니까 그 당시 원호법에 의한 원호 차원에서 국가유공자로 지원을 했다. 그들은 제4조 1항 9호에 들어가 있어 현재도 국가 유공자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렇기에 우리도 소년으로서 병역의무가 없다. 그래서 우리도 국가 유공자로 정당한 대우를 받도록 해 줘야 한다. 헌법에는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하게 돼 있다. 그런데도 국가가 저의는 어떤 이유에서 인지 그 법을 적용해주지 않고 있다. 국가 보훈처가 변명하기를 제일(일본) 학도의용군들은 한일 국교가 정상화가 되질 않아 귀국을 못 했기 때문에 지원했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일 국교 정상화가 언제 됐냐면 1665년 6월 22일 정상화가 됐다. 그러면 그때로 끝내야 하는데 그것을 변명이라고 하면서 20년에 거쳐 밀고 나오고 있다. 또 저의 학도병이 얼마만큼 국가를 위해 희생했는가 하면 1951년 2월 28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6.25 전쟁에 참전한 일반 단체나 학생들은 다 해산시킬 것을 명령하면서 일부가 해산됐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또 “3월 15일 서울이 2차 수복이 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아직도 군대 내에 학생들이 참전하고 있다는데 빨리 복귀조치 시키라고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런데 국방부 장관이 나와 확인결과 최전방 소대장부터 최종 국방부에 이르기까지 국군의 명맥을 이루는 행정 요원에서 기능직까지 등 모두가 ‘학도병’이 지원하고 있었다. 결국, ‘학도병’을 제대시키면 국군의 명맥이 무너질 판이었다”고 했다.
심 회장은 “아시다시피 그 당시는 무식자가 50%였다. 심지어는 편지도 ‘학도병’이 해주다시피 했다. 심지어 최전방 수색대원도 거의 다 ‘학도병’이었다. 힘이 있고, 빠르고, 용기가 있었다. 당시 우리 ‘소년학도병’이 몇 명이나 들어갔냐면 3년간에 거쳐 병적기록을 조사해본 결과 어린 학생들이 2만 9622명의 명단이 나왔고, 그중에 전사자가 2573명이 전사한 것으로 조사 됐다”고 밝혔다.
게다가 “병적기록부도 없는 지원한 ‘학도의용군’의 순자가 8700명(국방부 조사결과) 모두 합하면 4만 명이 조금 못 미친다. 그러나 등록되지도 못한 채 투입한 수를 포함한다면 5명으로 추산된다. 특히 ‘낙동강 전선’에서 제일 많이 ‘전사’했다. ‘안강(경북 경주시 안강읍)’이다, 안강 전투에서 제일 많이 희생됐다. 그 숫자는 아무 곳에도 등록된 데가 없다. 소년학도병 80%, 4만명이 참전을 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학도병들이 국군의 명맥을 이루는 분야에서 우리가 공헌했다. 그리고 휴전된 후 1953년 7월 27일 제대했다. 그런데 최소한도로 대통령께서 학도병들에게(학생들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는 치하의 말씀이라도 한마디 했으면 좋았는데 그 소리도 한마디 듣지도 못했다. 또 장교로 임관한 친구들은 7년~8년 후에 제대했다. 하지만 그 당시는 모두가 공부를 못할 수 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 당시는 국토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인해 그 사업에 다 참여를 하라고 했다. 우리가 ‘손상명 뉴스타운 회장’에게 한없이 고마운 것이 이 ‘학도병’에 대해 나라가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것을 민간차원에서 이렇게 ‘학도병상’을 해준다는 게 정말로 감격스럽다. 말 한마디에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그동안 우리가 20년간 국회를 드나들면서 배우지 못하고 빽이 없고, 돈이 없어 우리의 일을 성사시키지 못했다”고 속상해했다.
심 회장은 그러면서 “뉴스타운 손상명 회장의 방송을 몇 번 듣고 너무너무 고마워했다”면서 “위안부 소녀상보다. 소년학도병에 대한 위상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했던 것 아니냐”며 목메었다.
[6.25 포항 전투 때 학도병 이우근 호주머니에서 나온 편지]
1950년 8월 10일 쾌청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두고 10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군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이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같이 청결한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해내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 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 모릅니다. 저는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 갈 것 같지는 않으니깐 말입니다. 죽음이 무서운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가겠습니다.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됩니다.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그럼..
이 편지는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한 이근우 학도병의 편지다. 1950년 8월, 북한군 제12사단이 포항 북쪽 "흥해"를 점령해 포항 및 영남의 사수를 명 받은 국군 제 3사단은 위기에 처한다. 국군에게 포항여중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는 소총 한자루와 실탄 250발씩을 지급받아 학도병 소대를 편성한다.
그러나 지급받은 총알 250발을 다 쏜 학도병들은 압도적 숫자의 수 백명 인민군 정규군과 무려 11시간에 거쳐 백병전 사투를 벌여 인민군의 포항시내 진출 기도를 지연시키고 저지한다. 이 학도병들의 필사적 사투로 국군 제3사단은 보급품을 안전하게 이송할 수 있었으나 학도병들은 71명 중 47명이 전사했고, 17명이 부상했다
학도병 중 이우근 소년 병사가 마지막 전투를 남겨놓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소년 병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투가 끝난 후 여군 정훈장교가 전장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이우근의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발견했고, 피로 범벅이 돼 잘 읽어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학도병, 이들은 중학생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펜과 책을 던져놓고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섰다. 철모도 없었고, 군번도 없었다. 이들은 꽃 같은 젊음의 붉은 피를 이 땅에 뿌렸다. 5만여 6.25 참전 ‘소년소녀학도병’, 그들의 용기 있는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이 있었다. 우리는 이분들에게 꼭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이분들의 희생을 인정하고 하루빨리 ‘국가 유공자’에 대우와 혜택을 줘야 하는 건 두말할 이유가 없다. 북한에 한없이 퍼줄 돈은 있고, 이분들을 지원할 예산이 없다는 건 이 정부의 악날하고 지독한 핑계다. 명색이 정부라며 5.18 유공자보다 이분들이 대우가 우선되야 한다는 것 쭘은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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